- 희미한 기록이 명확한 기억보다 낫다 (박필순의 기록 흔적을 찾아서..) -
<조선 숙종대왕으로부터 마을 이름을 하사 받은 광양시 ‘금촌(錦村) 마을’>
-비정의 어머니 장희빈과 그 며느리-
조선 왕조의 비극 중 하나는 20대 비운의 왕 ‘경종’(재위 1720∼1724)이다.
경종은 숙종대왕의 맏아들로 숙종과 왕비 장희빈 사이에 태어났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기 전 ‘아들을 보고 싶다.’ 고 하여 경종을 만났다. 장희빈은 자신이 아들을 만나서 이씨집안 대를 끊겠다며 어린 아들의 고환을 불구로 만들어 놓고 간 비정의 어머니였다. 이 영향으로 경종은 자식을 낳을 수 없게 되어 다병(多病)무자(無子)의 삶이 시작 되었다.
숙종은 불운한 큰아들에게 비(妃)와 계비 두 며느리를 맞이하였다. 숙종은 세자의 불우한 처지와 처가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채홍사(採紅使)에게 계비(繼妃)를 구해 오도록 했다. 채홍사가 전국을 떠돌다가 광양현 바닷가 묵은 장터 마을에 들렸다. 이 마을에서 14살의 단아한 아가씨를 만나 숙종에게 데려 갔다. 숙종은 처녀를 만나 ‘어디에 사는 누구냐?’고 물으니 광양현 ‘묵은 장터’에 사는 어(魚)가 ‘라고 대답 한다. 숙종이 이 처녀를 며느리로 삼았다.
조선시대는 신분이 엄격한 사대부 중심 사회였다. 숙종은 평민인 며느리 신분 세탁을 위해 당시 일반화 되었던 양자 제도에 따라 처녀를 함종어(咸從魚)씨 였던 병조 참지 어유구(魚有龜)의 양녀로 입적시켰다. 그분이 바로 어유구의 양녀로 들어간 묵은 장터 출신 선의왕후(宣懿王后)이다.
생부 어(魚)씨는 딸이 계비가 되었지만 금촌에 그대로 살았다. 주변 사람들로부터는 부원군으로 불려졌다. 이 이야기 속에서 조선시대의 왕가와 사대부, 평민의 신분사회 속에 불운한 세자와 평민의 혼사에 시대상을 볼 수 있다.
숙종은 며느리가 살았던 마을에 비단을 내리고, ‘금촌(錦村)’이라는 부르게 했다. 그 때부터 ‘묵은 장터’마을은 ‘금촌’이 되었다.
경종은 후사 없이 재위 4년 만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때 선의왕후(宣懿王后) 나이는 20세였다. 묵은 장터 어씨 딸은 왕비가 되었지만, 20살에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되어 창경궁에 기거 하시다가, 26세에 곡기를 끊고 돌아가신 비운의 여인이었다.
선의왕후(宣懿王后) 친아버지 어(魚)씨는 금촌 마을에서 돌아가셔서 뒷산에 안장했다. 왕비의 친 아버지였지만 제대로 된 비석을 세우지 않고, 동네 입구 큰 바위에 '咸從魚氏之墓(함종어씨지묘)' 라는 비명을 남겼다.
뒷산에 안장된 묘소는 아이들의 놀이터로, 부원군(府院君) 묘라는 이야기를 마을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 왔다. 묘소는 2000년 경 강원도에서 온 어(魚)씨 집안에서 파묘하여 유골을 수습하여 가고, 동네 앞 묘비(墓碑) 새겨진 바위는 공장 축대가 되어있다.
전설 같은 이야기를 조영현 전) 광양제철고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듣고, 300년 전 조선왕가의 이야기 따라 금촌 마을 찾아서 바위에 새겨진 비문을 보고, 주변 어르신들을 만나 시대를 넘어 이어온 이야기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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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시 금촌 마을은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광양시 진상면 금촌 마을 옥곡면 금촌마을로 분리 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한마을이었다.
경종 (재위 1720∼1724)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윤(李昀), 자는 휘서(輝瑞). 숙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희빈 장씨(禧嬪張氏)이다. 비(妃)는 심호(沈浩)의 딸 단의왕후(端懿王后)이고, 계비는 어유구(魚有龜)의 딸 선의왕후(宣懿王后)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종 [景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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