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출신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꼽혔던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오늘(14일) 오전 71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입니다. 고인은 한때 '포스트 JP'(김종필 전 국무총리)로 불릴 만큼 충청권의 대표 주자로 통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여당 원내 사령탑에 이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라는 국무총리에 오르며 승승장구, 충청권을 대표할 대권주자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정치적 위기에 몰려 끝내 충청 대망론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고인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성균관대 법대를 졸업한 뒤 1974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기획재정부의 전신인 경제기획원에서 잠시 근무했습니다.
치안 분야로 옮겨 최연소(31살) 경찰서장과 충남·북지방경찰청장을 지냈습니다. 1995년 민자당에 입당해 정치에 입문했고, 이듬해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는 충남지역(청양·홍성)에서 유일하게 당선돼 주목받았습니다. 15·16대 국회에서 재선했으며, 신한국당 당대표 비서실장과 자민련 대변인, 원내총무, 사무총장 등 중책을 두루 역임했습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충남지사에 당선됐으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2009년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는데 반발해 "충남도민의 소망을 지켜내지 못한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며 지사직에서 전격 사퇴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계기로 충청권에서 입지를 다진 동시에 박근혜 전 대통령과도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원을 발판 삼아 '뚝심'의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한 고인은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건강이 나빠지거나 형사 사건에 휘말리는 아픔을 겪으며 좌절해야 했습니다.
2012년 19대 총선을 통해 국회 입성을 노렸지만, 그해 초 다발성 골수종 판정을 받았고 이후 8개월간 골수이식과 항암치료 끝에 병마를 극복했습니다. 이듬해 재보선에서 80%에 가까운 몰표를 받아 재기에 성공했고, 새누리당 원내대표로 선출하며 중앙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강성'인 새정치연합 박영선 원내대표의 카운터파트로 세월호 특별법의 여야 합의 처리 과정에서 협치의 새로운 모델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고인은 박근혜 정부의 두 번째 국무총리로 임명되면서 40년 공직 생활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일약 '충청 대망론'의 주인공으로 부상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2015년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로 불거진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사건에 연루돼 70일 만에 불명예 퇴진하고 말았습니다.
2017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했지만, 이후 정치 활동은 원로로서 이따금 현안 관련 조언을 하는 데 그쳤습니다. 지난해 총선 당시 자유한국당의 적극적인 출마 제의에도 "세대교체와 함께 인재 충원의 기회를 열어주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며 불출마를 선언, 정계에서 사실상 은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