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이미 하나의 거대 ‘소비도시 국가’로 재편되고 있다. 젊은 층은 일자리와 교육, 문화 인프라를 따라 대도시로 흡수되고, 그 결과 중소도시와 농어촌은 빠른 속도로 노쇠해간다. 인구가 줄어 상권이 무너지고, 다시 사람이 떠나는 악순환은 이제 통계의 문제를 넘어 우리 곁의 일상적 풍경이 됐다. 역설적이게도 이 흐름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이동이 있다. 경쟁의 속도를 견디다 못해 도시를 떠나 ‘자연 속 삶’을 꿈꾸는 장노년층이다. 그러나 이들의 귀촌은 ‘조건부 성공’일 뿐이다. 몸이 움직일 때까지만 유효한 평화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고 암이나 심혈관 질환 같은 중병이 찾아오는 순간, 그 삶은 즉시 흔들린다. 결국 돌아오는 말은 하나다.
“큰 병 걸리면 대도시 살아야 한다.” 이 말은 조언이 아니라, 이 나라가 지방에 던진 냉정한 판결문이다. 여수는 휴양도시지만, ‘치료도시’는 아니다. 여수만 봐도 명확해진다. 기후와 자연, 삶의 속도만 놓고 보면 여수는 분명 노년과 회복의 도시로 적합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조건 하나가 빠져 있다. 바로 대학병원급 중증 치료 인프라다. 암, 심혈관 질환, 중증 뇌질환이 발생하는 순간 여수 시민에게 선택지는 없다. 광주나 서울로 향하는 고단한 여정이 시작될 뿐이다.
이때부터 치료는 의료의 문제가 아니라 ‘물류와 인내’의 문제로 전환된다. 실제로 전남 지역에서 매년 타 지역으로 유출되는 관외 진료비 규모는 약 1조 5,000억 원에 달한다. 연간 수십만 명의 도민이 원정 진료를 위해 길 위에서 시간을 버리고 있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유출을 넘어, 지방 환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거리의 형벌’을 수치로 증명한다. 최근 필자 역시 이 현실을 몸으로 겪었다. 동생과 처남이 각각 암 진단을 받으면서, 환자보다 먼저 무너지는 것이 가족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보았다. 치료보다 더 힘든 것은 이동이었다. 처남의 경우 병원 간 이송을 위한 사설 구급차 비용이 왕복 한 번에 106만 원이었다. 서너 차례 오가면 수백만 원이 길 위에서 사라진다. 지방 환자에게 치료는 지출 이전에 체력 소모이며, 희망 이전에 포기 연습이 된다.
이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거 여수대와 전남대 통합 당시에도 대학병원 설치 논의는 분명히 포함돼 있었다. 지역 정치권에서도 대학병원 분원 유치를 추진해 왔으나, 지역 간 갈등과 의료 체계의 이해관계, 행정적 논의 구조 속에서 번번이 공전했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정치가 논쟁하며 시간을 버는 동안, 시민은 생존을 위한 골든타임을 잃었다. 논쟁은 서류상에 남았고, 환자들은 여전히 구급차에 실려 고속도로 위에 남겨져 있다. 의료는 경쟁의 대상이 아닌 생존 인프라다. 도로와 항만을 국가가 책임지듯, 중증 의료 접근성은 국가가 보장해야 할 헌법적 기본권이다.
지방 의료 문제를 단순히 ‘병원 하나 더 짓는 일’로 축소해서는 해답이 없다. 이제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대학병원 분원 국가책임제 도입: 인구 감소 지역일수록 수익 논리가 아닌 국가 책임 논리로 접근해 상급 의료기관을 설립·운영해야 한다. 중증 환자 이송 비용 국가 보장: 거주지가 멀다는 이유로 개인이 수백만 원의 이송비를 감당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의료 인프라를 인구 정책의 핵심 축으로 재설계: 병원이 있어야 사람이 남고, 사람이 있어야 도시가 지속된다. 의료가 곧 최고의 복지이자 최고의 인구 정책이다.
지방에서 늙는다는 것이 더 이상 아픈 몸을 이끌고 끝까지 버텨야 하는 고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방 소멸을 막겠다고 외치면서, 병들면 떠나야 하는 구조를 방치하는 것은 대국민 기만이다. 도시는 소비로 유지될 수 있지만, 국가는 국민의 생존을 방치할 때 무너진다. 이제는 정말, “큰 병 걸리면 대도시 살아야 한다”는 비극적인 명제를 대한민국에서 제도적으로 폐기해야 할 때다.
※ 본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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