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한옥마을의 겨울은 늘 조용하다. 경기전 일대를 걷다 보면 계절의 속도가 느려지고, 오래된 공간이 품은 시간의 결이 자연스럽게 전해진다. 관광객의 발걸음도 한결 느려지는 이 계절,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눈길을 붙잡는 풍경이 있다. 나무들이 알록달록한 뜨개옷을 입고 겨울을 맞이하는 모습이다.
처음 이 장면을 마주한 사람들은 대개 미소를 짓는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전주다운 풍경”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트리허그(Tree Hug)’ 활동은 겨울 장식이나 이벤트에 그치지 않는다. 전주 한옥마을의 뜨개옷 입은 나무들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ESG가 생활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장면이다.
이 활동은 거창한 계획이나 예산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실을 고르고, 색을 맞추고, 시간을 내어 한 코 한 코 떠 내려간 개인의 손길에서 시작되었다. 누군가의 관심이 모여 나무를 감싸고, 그 결과물이 도시의 풍경이 된다. 뜨개옷을 나무에 두르는 순간, 자연과 시민, 공간은 하나의 장면으로 연결된다.
이 풍경 앞에서 시민들의 반응은 흥미롭다.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는 사람, 아이에게 “누가 만들었을까?”라고 묻는 부모, 사진을 찍으며 겨울의 전주를 기억하려는 여행자. 이 모든 장면은 이미 환경 캠페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자연을 관계 맺는 존재로 인식하게 만드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ESG는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통해 지속가능한 사회를 이야기한다. 그동안 ESG는 기업의 경영 전략이나 공공기관의 정책 언어로 주로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지속가능성이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제도 이전에 생활 속에서 체감되는 경험이 필요하다. 트리허그는 바로 그 지점을 보여준다.
환경(Environment)의 관점에서 보자면, 뜨개옷은 혹한으로부터 나무를 보호하는 기능적 역할을 일부 수행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변화는 시민의 시선이다. 사람은 자신이 손을 대고, 시간을 들이고, 이야기를 붙인 대상에 대해 태도가 달라진다. 자연을 관리하거나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게 되는 순간, 환경 보호는 일상의 선택이 된다. ESG에서 말하는 환경 가치는 이 인식의 전환에서 출발한다.
사회(Social)적 의미는 더욱 분명하다. 트리허그 앞에서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 짧은 대화가 생긴다. “예쁘네요.” “누가 만든 걸까요?” 이 짧은 말들이 도시의 공기를 바꾼다. 공동체는 대규모 행사나 캠페인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런 일상의 미세한 접촉과 공감이 쌓일 때, 사회적 신뢰는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ESG에서 말하는 사회적 가치는 바로 이런 연결의 축적이다.
지배구조(Governance)의 측면에서도 트리허그는 주목할 만하다. 행정이 계획하고 시민이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이 아닌 시민이 먼저 움직이고 문화가 형성된다. 제도는 그 흐름을 지지하거나 확산하는 역할을 한다. 지속가능한 거버넌스는 규칙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시민이 공간의 주체로 참여할 때, 제도는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우리는 수소경제, 탄소중립, 친환경 기술을 이야기하며 지속가능한 미래를 그린다. 물론 기술은 중요하다. 그러나 기술은 방향을 제시할 뿐, 그 방향을 오래 유지하는 힘은 사람의 태도에서 나온다. 인프라가 아무리 잘 갖춰져 있어도, 그것을 존중하고 돌보는 시민의 시선이 없다면 지속가능성은 오래가지 못한다.
전주 한옥마을의 뜨개옷 입은 나무들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ESG를 설명하는 보고서 한 장보다 이 풍경 하나가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한다. 지속가능한 도시는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손길, 누군가의 시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민의 태도가 쌓일 때 도시의 방향은 조금씩 바뀐다.
이 겨울, 전주 한옥마을의 나무들은 조용히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속가능한 사회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어쩌면 그 답은 오늘 우리가 도시와 자연을 대하는 아주 작은 선택 속에 이미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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