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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 소식

“말과 돌, 그리고 사람” - 고흥 석촌문화공동체 결실

윤진성 편집국장   |   송고 : 2025-12-17 07:21:38

 

석촌문화공동체가 밝혀낸 3,500년 말의 역사와 600년 가문의 뿌리 2025년 12월 15일(월),고흥군 사회적경제·마을공동체 한마당이 고흥군민회관에서 열렸다.

 

고흥군 515개 마을 가운데 마을공동체 사업과 연관된 곳은 29개 마을.그 중에서도 과역면 석촌마을의 석촌문화공동체는 올해 처음 참여한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깊고 묵직한 질문을 던진 마을로 주목을 받았다.

 

석촌문화공동체는 “우리말로 공동체를 일깨우는 정신”을 기치로 〈다일라문화공동체 만들기〉라는 사업을 1년 동안 펼쳐왔다.

 

이 이름 속에는 단순한 구호를 넘어,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인간 존엄의 정신을 다시 이어가고자 하는 깊은 마음이 배어 있다.

 

 

 

태고의 공룡에서 고인돌의 주인까지, 석촌의 시간은 끊기지 않았다

 

이번 행사에 석촌 전시칸은 태고의 공룡이 이 땅에서 알을 까고 새끼를 치며 뛰어놀던 시절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위에 고인돌의 주인이 살았던 선사시대 석촌,임진왜란·정유재란·병자호란을 거치며 나라를 지켜낸 장군들을 배출한 조선의 석촌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석촌마을의 옛 이름은‘돌빼기’였다.말 그대로 큰 돌이 마을 앞에 박혀 있는 곳,즉 ‘돌박이 마을’였기 때문이다.

 

그 돌의 정체는 바로 고인돌이었다.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행정 지명은 ‘석촌(石村)’으로 바뀌었지만,이름이 달라졌을 뿐 마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석촌은 말 그대로 고인돌이 마을 이름이 된, 진짜 고인돌의 마을이었다.현재 확인되는 고인돌은 약 20여 기.

 

과거에는 30여 기가 넘는 고인돌이 마을 곳곳에 분포해 있었다.

 

돌빼기라는 이름 자체가 이 마을이 얼마나 오래된 공동체였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세종 때 1426년 등과, 김준 600년 가문의 뿌리 드러나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주목을 받은 부분은 조선 세종 때 1426년 등과한 김준(金遵)의 역사였다.김준은 병조판서(정2품), 영돈녕부사(정1품)를 역임한 조선 최고위 국대신이었다.

 

이번 조사와 전시를 통해 그로부터 이어지는 600년 가문의 전통이 석촌과 가산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음이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김녕김씨 대동보의 기록과 함께,실제로 석촌 일대에 분포한 묘역들은 문헌 속 인물이 아닌 살아 숨 쉬던 역사로서의 석촌을 보여준다. 석촌은 선사시대의 고인돌과 조선 최고 국대신의 가문이 한 공간에서 겹쳐진,시간이 켜켜이 쌓인 마을이었다.

 

 

 

또한 김준으로부터 이어진 이 가문은 단지 고위 관직을 지낸 명문가에 그치지 않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이라는 나라의 존망이 걸린 위기마다 이 가문은 앞장서 싸웠고,기록으로 확인되는 것만 해도 20여 명에 이르는 장군과 의병장을 배출한 호국충절의 가문이었다.

 

 

 

김구룡 장군, 김광협 장군, 김언공 장군, 김언량 장군, 김덕봉 장군, 김덕방 장군, 김기남 장군을 비롯해

 

이름 없이 싸운 수많은 의병들까지, 이들은 가문을 지키기보다 나라를 먼저 선택했다.

 

한 집안의 영달을 넘어 자신들의 삶과 목숨을 내어놓았던 이 정신 앞에서,오늘을 사는 못난 후손들은 이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그들이 지켜낸 것은 땅만이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기준이었고,그 정신은 지금도 석촌의 돌과 말과 역사 속에 살아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분명하다.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정신을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선양일 것이다.

 

 

 

“다일라띠요” — 초등학교도 못 나온 촌부들이 쓰던 말의 정체

 

이번 전시의 또 하나의 축은 ‘말’이었다.석촌문화공동체가 강조한 것은 눈에 보이는 유물만이 아니라,입에서 입으로 이어진 말의 역사였다.

 

우리말 연구가 김석훈 씨에 따르면 “다일라”, “다일라띠요”,그리고 “어이 마히시”, “애마리요”와 같은 말들은 적어도 3,500년 이전부터 사용된 말임이 밝혀졌다.

 

 

 

이 말들은 석촌의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가 아무 의식 없이, 그러나 자연스럽게 써왔던 말이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았던 우리 부모님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김석훈 씨는 이렇게 말한다.

 

“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말 문화는 우리 동이족의 선조들이 서로를 얼마나 존중하고 귀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줍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가 아내를 향해 “여왕님, 가까이 오소서(어이 마히시)”라고 부르면,어머니는 “왕이시여(애마리요)”라고 응답하던 문화.이 지구가 생기고 공룡이 뛰어놀던 까마득한 태고적 이 땅에, 이처럼 아름다운 인류의 문화가 있었던가. 그것은 분명 문명의 뿌리를 품고 있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았던 촌부들이 쓰던 말 속에,왕과 여왕의 언어가 살아 있었다.

 

 

 

스스로 바꾸는 마을, 석촌은 이미 미래를 살고 있다

 

석촌마을은 과거의 역사만 자랑하는 마을이 아니다.이 마을은 이미 50년이 넘은 낡은 개발위원회 제도를

 

마을 스스로 바꾼 대한민국 대표적인 자치 마을이다.

 

15년 전에는 1차 마을자치규약을 제정했고,2025년에는 개정된 마을자치규약에 따라 자치위원과 이장을 새롭게 선출했다.

 

 

 

이번 석촌문화공동체의 출범 역시 이 자치의 연장선에 있다.

 

석촌마을 회원들은 2025년 1월초 힘을 모아 석촌문화공동체를 결성했고,전라남도와 고흥군이 주관한 마을공동체 사업에 참여했다.

 

과거를 밝히되,현재를 바로 세우고,미래를 준비하는 마을.

 

 

 

“역사를 발굴하고 재인식하게 되어 만족스럽다”

 

행사장을 찾은 주민 박영수 씨는 “우리 마을 석촌이 이렇게 역사를 발굴하고 재인식하게 된 것이 아주 만족스럽다”며 “이제는 아이들과 젊은 세대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석촌문화공동체의 이번 시도는 마을공동체 사업이 행사나 소득을 넘어,말과 돌, 그리고 사람의 존엄을 되살리는 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돌빼기’에서 ‘석촌’으로,

 

고인돌에서 김준(金遵) 600년 가문으로, 그리고 “다일라”라는 말로 이어지는 공동체.석촌은 지금,태고에서 오늘까지 이어진 자기 자신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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